마티네의 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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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지만 인간에게는 허구인 덕분에 글로 쓰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는 비밀도 있고, 반대로 허구를 둘러씌우지 않고서는 쓸 수 없는 비밀도 있다.
2. "인간은 바꿀 수 있는 것은 미래뿐이라고 믿고 있어요. 하지만 실제로는 미래가 항상 과거를 바꾸고 있습니다. 바꿀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있고, 바뀌어버린다고도 말할 수 있죠. 과거는 그만큼 섬세하고 감지하기 쉬운 것이 아닌가요?"
3. 아버지가 '베니스에서 죽다' 증후군이라고 하더군요. 아버지가 지어낸 말이지만, 그 정의는 '중년이 되어 돌연 현실사회에 적응하는 데 염증이 나서 본래의 자신으로 되돌아가려고 파멸적인 행동에 나서는 것' 이라네요.
4. "당신은 지금 이라크에 가 있어. 그리고 뭔가 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고민하고 있어. 그건 자신의 능력이라기보다 인간의 능력 자체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거야. 인류는 생물로서 기껏해야 걸어서 이동할 수 있을 정도의 환경 속에서 진화해왔어. 지구 전체가 실시간으로 링크된 이런 상황은 한 개인의 가능성을 진즉에 뛰어넘은거야. 그렇다면 나 자신이 살아가기 위해 가장 최적의 환경을 선택하고 그것을 자신의 세계로 삼는 수밖에 없어. 그 안에서 행복을 바랄 수밖에 없다고. 그렇잖아? 당신은 결코 세계의 불행을 외면한 게 아니야. 자진해서 관여했다고.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이제 그다음은 또 다른 사람이 그 책임을 완수하도록 넘겨주면 되는 거야."
5. 요코는 두 번째 바그다드 취재에 대한 자신의 지나친 기대를 냉철히 되돌아보았다. 그것이 실패로 끝나려 하는 지금, 그녀는 미래에 대해 망막하고도 암울한 뭔가를 느꼈다. 저널리스트로서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두 번의 이라크 취재 경력은 틀림없이 회사 내에서의 승진에 유리할 것이다. 하지만 왠지 그것을 순수하게 기뻐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 그 인터뷰 때 만약 질문을 한 개만 더 했었더라도 자폭 테러에 휘말려 사망했을 것이다. 단 한 개.... 나는 왜 아직 살아남아 있는 걸까.
6. 말로 하는 것 이외에는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울 방법이 없겠지만, 자신을 향해서 스스로에 대해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새삼 느끼고 있어요.
7. 마키노는 자신 속에 요코에게서 사랑받고 싶다는 감정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제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가슴 속에 대낮처럼 환한 빛이 켜져서 그 눈부심을 미처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요코도 나를 사랑하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언동에서 그런 조짐을 발견할 때마다 마키노는 고통스러웠고, 그게 아닌지도 모른다고 마음을 돌릴 때도 역시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자신이 애초에 그녀의 사랑에 값할 만한 인간이기는 한 것인지, 최대한 냉정해지려고 생각에 잠겼다가 오히려 역효과만 겪곤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사랑의 효능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나이와 함께 인간이 연애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은, 사랑하고 싶은 열정의 고갈보다 '사랑받기에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한가'라는, 10대 무렵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그 많은 자의식의 번뇌가 둔화되었기 때문이다.
아름답지 않기 때문에, 쾌활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 것이라는 고독감을, 일이나 취미 같은 장점은 그럴 리 없다고 간단히 위로해버린다. 그리하여 인간은 단지 그 사람에게 사랑받기 위해 아름다워지고 싶다, 쾌활해지고 싶다고 간절히 꿈꾸는 것을 잊어버린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 값할만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바람이 없다면 사랑이란 대체 무엇인가.
8. 젊은 사람의 마음 속에는 육체와의 경계쯤에 매우 가연성이 높은 부분이 있다. 어느 순간 우연한 계끼로 그한끝에 불이 붙으면 그것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서 손을 댈 수 없게 되고 만다. 그 불길에 상대의 마음이 만나 불타버리면 두 사람은 단지 고통에서 달아나려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원할 수밖에 없다.
9. 괴로운데도 태연한 척하는 사람이 그 괴로움의 원천을 뭔가 파멸적인 방법으로 잘라내려고 하는 것은 무섭죠. 그렇게 해서 동시에 자신이 괴로워했던 것을 남에게 이해받으려 하는 것도.
10. 요코는 이제는 오로지 자신의 마음에 충시랗자고 마음먹었다. 인간에게 결단을 재촉하는 것은 밝은 미래에 대한 적극적인 꿈이라기보다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현재 상태에 계속 머무는 것에 대한 불안이었다.
11. "이건 너의 의식의 문제가 아니야. 대체 무엇이 어제도, 내일도 아니고 오늘, 너를 이곳까지 데려왔을까? 무엇이 너를 지금 이곳에 존재하게 하지? 만일 지금 여기서 누군가 총을 난사한다면 문제는 바로 그 사실이 아니겠니? <베니스에서 죽다>에 에센바흐도 타지오를 쫓아갈 생각이었지만 사실은 쫓기고 있었던 거야."
12 "아버지의 영화에는 '인생은 어디까지 운명인가'라는 주제가 항상 따라다니지만 지금은 어떠세요? 인간의 '자유 의지'에 관해서는 여전히 비관적이에요?"
소릿치는 스테이크를 조금 남긴 채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그리고 잠시 생각해보더니 요코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몸짓은 '각자 따로 떨어져살았는데도 어쩌면 그렇게 부녀간에 꼭 닮았는지'라고 얼마 전에도 나가사키의 어머니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던 것이었다.
"자유의지라는 것은 미래에 관해서라면 없어서는 안 될 희망이야. 인간은 자신이 뭔가를 해낼 수 있다라고 반드시 믿을 필요가 있어. 그렇지? 하지만 요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과거에 대해서 깊은 회한이 드는 법이야. 뭔가 좀 더 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라고 말이야. 운명론이 오히려 위로가 되는 경우도 있어."
클래식에 대해 잘 모르지만 한 편의 음악처럼 읽은 소설이었다. 중간에 둘이 헤어졌을 때부터는 읽어내리기가 어려워 읽기를 멈췄다가 다시 또 읽었다. 내가 어려워하는 건 이런 종류의 순간들일 것이다. 누구든 겪어야 하는 아픔, 잠깐이라도 내리막쳐야 하는 순간, 해가 뜨기 직전에 가장 고요하고 어두운 그 순간, 그런 종류의 시간들이 나는 항상 어렵다. 하지만 마키노와 요코는 그 시간을 딛어 내려 움직이고 또 운명처럼 다시 만난다. 그렇지, 뭐 이렇게든 저렇게든 딛어내면 되는 거겠지. 그냥 그런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