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매번 정신력이 강한 사람을 부러워했다. 흔히들 말하는 멘탈이 강한 사람. 그 뒷배경에 어떤 성정과 어떤 생활 환경이 존재하는지는 몰라도, 그런 사람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절로 들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종류의 부러움은 쉽게 삼켜지지가 않았다. 

물론 가정 환경이 유복하거나 태어나기를 건강하게 태어난 사람들도 존재한다. 정신력이 강한 사람들을 볼 때 그 사람이 어떻게 저런 강한 멘탈을 얻게 되었는지 구분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 쟤는 애초에 태어나기를 저렇게 태어났을 거야. 라고 피어나는 부러움을 합리화시킬 때도 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강한 멘탈의 누군가도 흔들리는 때가 있을테지만 우선은 나는 강한 멘탈의 사람이 아니라는 걸 요지로 삼겠다. 요즘처럼 생활이 평화롭고, 자잘한 일상의 스트레스를 제외하면 무료하기까지 한 인생 속의 풍파는 나를 냅다 끝으로 밀어버린다. 감정의 소용돌이는 물벼락처럼 쏟아져내려 나는 그저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린다. 그러다보면, 이게 단순히 흔들리는 것인지 아니면 내 자체가 삐뚤어져 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 내 정신력에 대한 의구심은 시작하는 그 순간 정도를 모르고 내달린다.


안타깝게도 세상엔 한 번 삐끗하면 되돌아 오기 힘든 일이 수두룩하다. 내 모토는 늘상 드리워지는 불행은 무시하고 자잘하게 널부러진 행복 하나하나를 줍고 살자는 것인데, 요 불행이란 놈이 내가 살짝 삐끗한 순간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린다. 그 순간 그 상황은 그저 삐끗한 것으로 끝나지 않고 아주 내 걷기를 멈추게 만든다. 


게다가 이번 삐끗은, 삐끗 정도가 아니라 아주 작은 돌부리에 멈칫하고 놀랐을 뿐이다. 그런데 내가 여기에서 멈춰버린다면, 놀라서 걷는 걸 잊어버린다면, 그러면 도대체 내 걷기는 어떻게 되어 버리는 것일까. 


난 지금 내 정신력이 그 수준에 머무른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 나의 정신력은 강한 척 하는 허상, 사실은 아무 것도 없는 껍데기.


2.

밑 바닥에 다다랐을 때 다시 사람을 일어서게 만드는 것은 그 사람의 교양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교양의 사전적 정의는 학문, 지식, 사회생활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품위 또는 문화에 대한 폭 넓은 지식. 말하자면 그 사람이 지닌 인문적인 성향, 타고났거나 혹은 길러져 있는 마음의 기둥 같은 것이다. 


난 항상 내가 교양 있는 인간이기를 바랐다. 


누군가를 함부로 재단하지 않길, 누군가를 함부로 판단하지 않길. 내가 가진 지식들과 학문들을 남에게 자랑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자랑을 들으며 그것들을 그 사람을 알기 위한 초석으로 삼길. 내뱉는 단어나 어투들로 그 사람 전부를 평가하지 않길. 나는 그런 것들이 교양이라고 생각했다.


수 없는 관계 속에서 내 교양은 무너져 갔다. 내 다짐들이 그 속에서 얼그러져 갈 때마다 그 뒤에 놓여져 있는 내 타고난 성향은 모든 것에서 관심을 거두어 버리는 나태함, 더하여 도피성 성향으로 나를 몰아갔다. 교양 있는 인간이기를 바랐던 나는 그런 순간들마다 단순한 도망으로 상황을 모면했다.


뭐 어때, 그게 나쁜 것도 아닌데. 항상 이런 식으로 생각했다. 강한 척을 하는 나약한 정신력이더라도, 스트레스 가득한 상황에서 베스트 선택지가 도망인 비겁함이 내 성정이더라도 그러면 뭐 어떠냐고 생각했다. 적어도 내 나약한 정신력과 비겁한 성정은 남에게 폐를 끼치진 않았으니까. 때문에 이 도망은 내게는 일종의 가드인 셈이었다. 한 숨 푹 내쉬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 숨 죽이는 것. 나만의 방패.


그리고 우연히 컬링 경기를 봤다. 온갖 매체에서 빙판과 눈을 떠들어 대는 이 때에 얼음판 위에서 미끄러지는 스톤은 가드라고 세워져 있는 스톤을 치고, 한 때는 가드였던 스톤은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스톤들을 하우스 밖으로 밀어냈다. 한 때는 가드라고 세워져 있던 그 스톤이 한 순간에 적으로 변모했다.


내가 가진 도피라는 가드놈도 저런 놈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름이 방패인데, 실은 살짝만 밀침을 당해도 나의 모든 것을 삶의 저 편으로 밀어버리는, 방패도 창도 아닌 나의 가드.



3.

암담하다. 어떻게 할지 도무지 답이 나오질 않아서 일을 하다가도 멍을 때리고, 밥을 먹으면서도 생각에 잠기고, 쓸 데 없는 수다를 떨다가도 머리 한 구석엔 또 다른 불행들이 뭉개뭉개 무리를 지어냈다. 이유 없이 가슴이 뛰는 걸 애써 숨기고, 시선이 누군가를 쫓는 걸 막아낸다. 교양 없는 나를 드러내기가 무서워서 부러 가벼운 사람임을 자처하고 깊은 이야기에는 발을 빼려 농담을 앞세웠다. 교양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마치 그런 기준은 없는 사람처럼. 취향이라는 것이 없는 사람처럼. 그렇게 굴었다.


실은 모든 것이 무서웠던 탓이다. 

경험의 부족함이 무서웠다. 그 부족함 사이에서 새어나올 내 실수들도 두려웠다. 때문에 행동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상들을 늘려나갔다. 행동 대신 머리 속으로 상상하는 일이 많아졌다.

취향이 나를 대변한다는 것도 무서웠다. 내 취향을 보면 나를 알 수 있다는 건 반대론 취향을 가지지 않으면 그 누구도 나에 대해 알리 없다는 말이 되니까. 교양을 가지고 싶었는데, 그 교양을 가지는 순간 사람들 앞에서 나를 까발려야 한다는 모순이 생겼다.

기대 또한 무서웠다. 기대를 하지 않으면 실망할 일도 없으니까 기대를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관계에서의 실망감이 나를 항상 도망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또 그렇지 않은 체를 했다. 실망하지 않은 체 하는 일은 실망감보다 배는 더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주위에 내게 관심을 가져주는 고마운 몇몇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내 한 켠에 작은 위로가 되어주었지만, 때론 그들 속에서도 견디지 못 하고 도망쳤다. 그렇게 해버리고 나면 끝 없는 괴로움만이 내가 받을만한 일이라는 양 쏟아졌다. 나는 나를 창피하게 여겼다. 쪽팔림은 실망감이나, 버림 받았다는 기분보다 더 나를 짖눌렀다. 내 속에서 나는 교양 없는 사람, 일어설 기준이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난 계속해서 뒤로 물러설 줄 밖에 모르는 사람인 것이다.



4.

애초에 말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나에 대해 알 수가 없다. 


당신이 당신 속에 아무리 기준을 키우고 취향을 키워나가도 누군가가 그걸 알아주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당신 속에서 단지 머무를 뿐이다. 당신은 그것에 그저 만족하며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리고 실제로 거기에 머물러 만족한대도 그건 나름대로 괜찮은 삶일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이 누군가와 관계하고자 할 때, 그에게 당신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기준은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어버린다. 

당신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 관계의 초석이 된다. 말하다가 입을 다무는 것과 애초에 말하는 것을 포기해버리는 것은 다른 일이다.



5.

단지 평화롭기만 하던 삶에서 한 사람의 존재로 이렇게 마음이 불편해지는 건 내 스스로가 애초에 단단하지 않았던 것 뿐이다. 내가 단단했더라면 무슨 일이 일어나던 내 삶은 흔들리지 않는다. 


결국 강해지는 수 밖에 없다. 


내가 강해지지 않으면 상황에 휩쓸리는 순간 나를 미워하는 건 오롯이 나 뿐이다. 내가 나를 미워할 때 세상 그 누가 나를 미워하는 것보다 더 스스로를 미워할 수 있다는 걸 나는 안다. 사람은 악독하다. 당신이 당신을 미워하기 시작하면, 세상 그 누구도 당신보다 당신을 미워할 순 없게 된다. 나에게 미움 받는 내가 되던지, 강해지던지. 이 두 개의 선택지는 내 마음을 너무나도 불편하게 만든다. 



6. 

아래는 얼마 전에 읽은 글의 내용이다.


"오스틴은 첫째, 사람들의 약점이나 어리석음에 대해 '즉각 간파할 수 있'지만, '결코 매몰차게 말하지 않'는다. 둘째, 그녀는 무슨 체하는 일이 없다. 셋째, 아무리 상대가 결함 있어도 '그녀는 언제나, 다른 사람의 결함에서, 용서하거나 잊어버릴 수 있는 무엇을 찾아'낸다. 그리고 '도무지 정상참작이 어려울 경우에 그녀는 확고하게 침묵을 견지'한다. 놀라운 너그러움이 아닐 수 없다. 넷째, '그녀는 결코 성급하거나 어리석거나 가혹한 표현을 하지 않았다.' 엄청난 절제고 신중함이다. 다섯째, '그녀는 조용했으나, 그렇다고 새치름하거나 뻣뻣하지 않았다. 서로 얘기할 때에도 끼어들거나 자만하지 않았다.' 이것은 균형 감각-활기 있는 평정심이다. 여동생의 이런 성격은, 오빠에 따르면 '전적으로 취향과 성향'으로부터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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