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름은 더워도 너무 더웠다. 한 번 올라간 기온은 다시 내려오지 않는다는 내용을 트위터에서 봤다. 내년에도 비슷한 말과 비슷한 심정을 갖게 되려나.
1. 하노버에서 온 음악편지
도대체 왜 지금 이 짓거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L을 강압과 회유 끝에 피아노 앞에 앉혔다. 한 시간여에 달하는 프로그램. 그가 마지막 음을 끝내고 비명을 지르는 순간 K와 나도 한숨을 내쉬었다... 1분쯤 지났을까, 나와 K 가 참지 못하고 먼저 뱉은 말, "아, 정말 너무 좋다... 좀만 더 쳐주면 안 돼?"
잘 세팅된 홀도, 잘 조율된 피아노도, 맘먹고 무대에 오른 완벽한 연주도 아니었지만 우리 모두는 그날 느꼈다. 베토벤은 어떻게 곡을 이렇게 썼더란 말인가, 쇼팽은 어점 이런 하모니를 썼더란 말인가, 이러니 음악은 얼마나 좋은가, 음악을 함은 얼마나 감사한 일이던가.
결국 우리 셋은 돌아가며 장장 새벽 2시까지 이 곡 저 곡을 치고 나서야 강당을 나섰다. 누군가 나에게 음악을 왜 하느냐고 묻는다면 글쎄, 사실은 감히 답하고 싶지 않다. 그 대답은 내 음악과 내 인생이 대신 해주었으면.
그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그 느낌, 나를 둘러싼 세상이 모두 한없이 차가운 그 느낌. 아직도 이따금씩 떠오르는데, 주로 무대 위에서다. 이 순간, 그저 공기 중으로 증발해 버렸으면 하는 그 기분. 아무리 내가 무대를 좋아하고 연주하는 순간을 제일 행복해 하더라도 꼭 한 번씩은 찾아오는 기분이다.
우리 피아니스트들은 특히 '혼자됨'을 잘 안다. 현악기나 관악기 주자는 하물며 '반주자'라도 대동하는데, 우리는 줄곧 혼자다. 연습할 때도, 연주할 때도, 또 그 사이사이에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꽤나 아찔한 느낌이다. 많게는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나만 바라보고 있는데, 나는 완벽하게 혼자라는 사실.
가족도, 친구도, 전화기도, 악보도, 아무것도 내 곁에 없는데, 나는 무조건 멈추지 말고 계속해야 된다는 그 사실. 그 사실이 더 잔인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게 '산다는 것'과 너무도 똑같아서다. 인생이라는 무대에 던져진 인간은 누구나 혼자다. 그러니 어쩔 수 없겠지. 예전에 내가 좋아하던 한 애니메이션의 극장판 에피소드 제목이 그랬다. "YOU ARE (NOT) ALONE."
2.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과거의 무력한 나를 떠올리는 경험을 할 때마다 감정을 추스르기 힘들다. 얼마 전엔 엄마에게 집을 살 거라고 했다가 "서울은 집이 너무 비싸서 어차피 넌 노력해도 못 사"라는 말을 들었다. 내가 대학에 가고 싶다고 했을 때도, 서울로 가고 싶다고 했을 때도 부모님은 같은 놀리로 내게 말했었다. 그들은 경험한 적이 없는 것이다. 원하는 것을 성취한 경험 말이다. 그 때문에 인생에서 원하는 것이 있다면 노력해서 가지라고 말하는 대신, 상처받지 않기 위해 '포기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상처받은 사람들, 사랑받지 못한 사람들은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상처를 다독이며 산다. 얼핏 다 나은 것 같아 보여도 통증은 불현듯 찾아온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우리가 만나는 많은 이들은 마음의 지옥을 견뎌내는 생존자들인 것이다. 이들은 이전으로 돌아가기를 두려워하지만, 지금 여기서도 영원한 이방인으로 떠돌아다닌다.
분노하고 불만을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멈추지 말자. 어릴 때 배웠던 것만큼 아름답지만은 않은 세상이지만 '그래도 혹시'의 마음만은 잃어버리지 않도록. 최선이 없다면 차선을, 차선이 없다면 차악이라도 선택해야 한다는 절실함만이 최악을 막아준다.
나에게는 좋지 않은 순간에도 적극적으로 웃음 포인트를 찾아내는 특기가 있다. 살다 보면, 웃긴데 슬프다는 뜻의 '웃프다'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경우가 참 많다. 그런 상황을 두고 농담을 하다 보면 주어진 상황이 조금은 덜 심각하게 느껴진다. 이는 그만큼 거리를 두게 됐다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 상태가 나아졌음을 파악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준비가 되지 않았음에도 거절하면 상대가 실망할까 봐 섹스에 응했다는 여성들을 아직도 주변에서 많이 만난다. 하지만 자신의 몸조차 자신의 판단으로 결정할 수 없다면 도대체 무엇을 자기 힘으로 결정할 수 있을까?
정확하 뜻을 검색했더니 '사용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가구나 가전제품 따위에 생기게 되는 흠집'이라고 쓰여 있다. 쓰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생기는 흠집이라니! 나는 이 담대한 표현이 좋아졌다. 이에 비해 '흠'은 '어떤 물건의 이지러지거나 깨어지거나 상한 자국, 어떤 사물의 모자라거나 잘못된 부분, 사람의 성격이나 언행에 나타나는 부족한 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흠이든 생활 기스든 생채기가 난 건 똑같지만 그걸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의 차이라고 나는 이해했다.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상처받지 않는 무균실의 환경이란 건 있을 수 없으니, 누구에게나 흠이 나 있을 것이다. 잘 해보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주고 받게 되는 일이 부지기수다. 보석함에 고이 모셔두지 않은 이상 매일 끼고 있는 반지라면 생활 기스를 피할 수 없듯, 살아가는 일에서 상처를 피할 순 없다. 더욱이 열심히 살아온 사람일수록 더 많은 상처가 있는 법이다. 실패에서 오는 괴로움을 그렇게 이해하면 스스로를 좀 더 편안하게 볼 수 있지 않을까. 그건 그냥, 거대한 흠이 아니라 자잘한 생활 기스들인 거다.
기존의 질문 '그 사람은 그것만 빼면 괜찮은가?'와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는 틀렸다. '그의 단점이 객관적으로 문제가 되는 수준임이 분명한가?'와 '단점이 개선되지 않는다해도 그것을 내가 감당할 수 있는가?'로 옮겨가야 한다. 인간은 잘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 후, 그가 바뀌지 않더라도 내가 그를 감당할 수 있는지 물어야 한다.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면 일단은 적당한 거리를 둔 후 생각해도 늦지 않다.
20대는 오디션에 나온 지원자처럼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 보여야 하는 시기다. 심사위원 같은 주변인들은 지금은 믿을 수 없으니 무언가를 더 보이라고 보챌 것이다. 이때 남들이 하는 말들을 다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누구든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해선 잘 모른다.
지금의 내게 맞지 않는 걸 예전에는 맞았던 사이즈라고 욱여넣고 있으면 필연적으로 자신을 미워하게 되고야 만다.
20대 후반에 겪은 교통사고는 나의 몸 상태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사고 후유증으로 뛰지 못하며, 체력이 떨어져 밤을 새우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전과 달리 12시가 되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체력이 떨어지니 불편한 사람을 만나면 에너지가 급속도로 방전되는 것이 느껴진다. 시간관념도 달라졌다. 무한하게 느껴지던 시간은 내가 건강할 수 있는 시간으로 가늠되고, 그중에서도 만약 아이가 생긴다면 내 것이 아닐 시간으로도 환산해 체감하게 됐다.
그렇게 계산을 해보니, 나에게 유효한 시간을 얼마 없었다. 철저하게 내게 중요한 것들의 우선순위를 세우고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그 기준으로 세상을 보니, 예전 같았으면 그냥 참았을 만한 일 중에서도 그냥 내가 피할 수 있는 것은 적극적으로 피하게 된다. 엉뚱한 곳에 에너지를 쓰면 정작 내가 필요한 곳에 쓸 수 없으니까.
어떤 소설은 재미가 없어 던져두었다가 몇 년 후에 다시 보니 충격적으로 좋기도 하고 어떤 소설은 한때 참 좋아했는데 다시 보니 시시하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예술도 사람도 마찬가지다. 상대가 바뀐 것이 아니라 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언가를 어떤 시기에 잠깐 거쳐 간 뒤 거기에 대해 다 안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3. 읽다-김영하
영화는 상영 도중에 일어나서 나가려면 눈치가 보이지만 책은 혼자 읽는 것이어서 잠깐 책장을 덮는다고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책을 읽는 매 순간, 우리는 결정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읽겠다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렇게 해서 한 권의 책을 끝내게 됩니다. 완독이라는 것은 실은 대단한 일입니다. 그만 읽고 싶다는 유혹을 수없이 이겨내야만 하니까요.
비극은 대부분 우리보다 나은 사람이 내재된 성격적 결함으로 파멸하는 얘기입니다. 반대로 희극은 우리보다 못한 이가 우스꽝스런 행동을 하는 것을 편안한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나리오를 쓰려고 한다면 적어도 자기가 쓰는 것이 비극인지 희극인지를 결정해야 하고 그에 따라 걸맞은 덕성 혹은 모자람을 인물에게 부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또한 "비극에서 우리를 가장 매혹하는 것은 급전과 발견"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어 극작의 초심자들이 "사건의 결합보다 조사와 성격묘사에서 성공을 거둔다."고 말하는데, 이는 플롯을 성격보다 더 높이 평가하는 그의 이론과 일치합니다. 그는 극에서 중요한 것은 인물의 성격보다 '사건의 결합', 즉, 플롯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 플롯에서 중요한 것은 스토리를 완전히 달리 보게 만드는 반전, 그리고 그 반전을 통해 주인공이 획득하게 되는 새로운 인식이라고 보았습니다.
<오이디푸스 왕>의 반전은 범인이 왕 자신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에서 왕은 세상에서 제일 똑똑하고 잘났다고 생각해왔던, 죄는 오직 다른 사람이 지을 뿐 자신은 그럴 리가 절대 없다고 믿었던 중대한 착각과 오만을 '발견'합니다. 그때까지 오이디푸스에 감정이입했던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그의 발견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과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우리는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주변은커녕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존재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요. 이런 발견의 순간에 리어 왕은 통탄합니다. "내가 누구라고 말할 수 있는 자 누구냐?" 막내딸의 진심은 헤아리지 못한 채 다른 딸들의 입에 발린 아양에 넘어간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파멸한 그는 이제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콜래트럴>의 빈센트도 인생의 마지막날에 이르러서야 자기가 냉혈의 킬러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런 '발견'의 장면이 비극에서 필수적이라는 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2000년도 더 전에 알고 있었고, 그에게 이런 깨달음을 준 것은 바로 당대의 탁월한 비극 작가들. 소포클레스나 아이스킬로스 같은 이들이었을 겁니다.
소설을 읽음으로써 우리가 얻은 것은 고유한 헤맴, 유일무이한 감정적 경험입니다. 이것은 교환이 불가능하고, 그렇기 때문에 가치가 있습니다. 한 편의 소설을 읽으면 하나의 얇은 세계가 우리 내면에 겹쳐집니다. 저는 인간의 내면이란 크레페케이크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상이라는 무미건조한 세계 위에 독서와 같은 정신적 경험들이 차곡차곡 겹을 이루며 쌓이면서 개개인마다 고유한 내면을 만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4. 온전히 나답게
'생활'의 중요성을 자각하게 된 건 20대 중반을 지나면서부터였다. 건강하게 살지 않으면 건강한 사고도, 건강하지 않은 사고도 할 수 없었다. 토대를 탄탄하게 쌓아놓지 않으면 나의 비관에 나 자신이 무너져버릴 수도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찾아 끝없이 헤매는 것이 아니라 여기와 저기 사이를 왕복하는 산책을 하게 되었고, 운동을 하게 되었고, 요리를 하게 되었고, 마음에 드는 이불보를 찾아다니게 되었다. 생활의 토대를 단단히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제야 마음속 깊이 안심이 되었다. 그제야 덜 휘청거리게 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잃은 것도 있을 것이다. 원대한 포부나 꿈꾸었던 자유로운 인생 같은 것들.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모든 걸 다 가질 수 없으니까. 인생의 어느 순간에는 자신이 살아가야 할,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인생을 선택해야 한다. 선택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며 살아야 한다.
하찮은 일들이 쌓이고 쌓여서 인생이 된다는 것. 하찮아 보여도 그게 인생이라는 것. 그 하찮음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인생이 즐거워질 수도 비참해질 수도 있다는 것. 그런 것들을 나는 살아가면서 배웠다. 그래서 그런 일들에 대해 쓰고 싶었다.
딱히 무슨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젊었기 때문이다. 모든 게 절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뭘 해야 좋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냥 죽어도 좋을 것 같았고, 사는 게 의미 없는 것 같기도 했고, 그럼에도 내 앞에는 아직도 살아야 할 시간들이 구만리였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누가 시킨 장거리 달리기를 별 의지도 의욕도 없이 달리고 있는 거나 같았다.
그럼에도 좋아하는 책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어렵다. 좋아하는 책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좋아하는 남자애에 대해서 말하는 것과 같다. 엄청나게 많은 좋은 점들을 갖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두려운 마음이 든다. 겨우 저 정도의 남자애를 좋아하느냐는 핀잔을 들을까 두렵기도 하다. 어쩌면 사람들이 그 애에 대해 실망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기도 한다. 나는 가급적이면 그 애를 감추고 싶다. 가급적이면 나만 아는 좋아하는 사람으로 남겨두고 싶다. 하지만 좋아하는 마음만큼은 온 세상에 다 떠벌린다 해도 모자랄 판이다.
내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고, 최소한 그것만은 엄청난 자제력을 발휘해 지키는 것이 있다. 그것은 아이들을 '너는 어떤 사람'이라고 규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말을 수없이 듣는 것만으로도 자라면서 아이가 자신을 어떤 인간이라는 틀 속에 가두게 될 위험이 엄청나게 크기 때문이다. 그 아이가 타고난 성격 때문에 책망을 듣게 하지 않는 것도 내가 반드시 지키고자 노력하는 것 중의 하나다.
지금 내가 골목길을 이리저리 비틀어 올라가던 어린 나의 뒷모습을 보게 된다면 나는 그 아이가 안쓰러워 어찌할 바를 모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건 네가 앞으로 겪을 수많은 비참함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말해 주었을 것이다.
아이들도 알게 될 것이다. 하루 종일 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아, 오늘은 정말 최고의 하루였던 것 같아!"라고 생각해도 집에 돌아오면 밋밋하고 재미도 없고 해야할 일들로 가득한 남은 날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해야하는 숙제와 방 정리, 싫어하는 반찬도 골고루 먹기, 양치질, 동생과의 싸움, 잠자리에 드는 일 같은 것들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아이들은 맥이 빠진 채로 잠자리에 들겠지만 결국 남은 인생은 그런 날들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반복적인 일상 속에서도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느냐, 없느냐일 뿐이다. 만약 그런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아이라면 멋진 하늘과 길에 핀 이름 모를 꽃과 겨울의 기대를 품은 바람과 좋은 음악과 아름다운 문장과 벅찬 대화와 산책과 맛있는 음식에 설레는 어른으로 자랄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바로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의 모든 것 말이다.
5. 책을 지키려는 고양이
"너 정말 이거 다 읽었어?"
"그래. 벌써 오래전 일이지만."
"넌 역시 보통이 아니야. 난 너무 어려워서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던데."
"그거 잘됐네."
책상의 먼지를 털면서 웃는 린타로를 보고 사요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잘됐다고?"
"책을 읽고 어렵게 느꼈다면 그건 네가 그동안 몰랐던 새로운 게 쓰여 있기 때문이야. 어려운 책을 만났다면 그거야말로 좋은 기회지."
"무슨 말이야?"
사요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책이 쉽다는 건 네가 아는 게 쓰여 있다는 증거야. 어렵다는 건 새로운 게 쓰여 있다는 증거고."
사요는 희귀동물이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린타로를 보았다.
"넌 역시 변태야."
"너무 심하게 말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나쁘지는 않아."
6. 슬픔이여 안녕
"그분은 일반적인 지성의 형태는 지니고 있지 못할는지 모르지만..."
그녀는 이해성 있는 태도로 내 말을 가로 막았다.
"쎄실이 말하는 지성의 형태라는 것은 단지 지성의 연령을 가리키는 거겠지."
그녀의 간결하고도 결정적인 표현이 나를 매혹시켰다. 어떤 표현들은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어도, 내 마음을 사로잡는 어떤 지적이고도 미묘한 분위기를 풍겨주기도 했다.
"어쨌든, 넌 꽁하고 있진 않구나."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안느가 적의를 품고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가 너무나도 철저하게 냉담하다고 느꼈다. 그녀의 판단에는 악의에서 우러나온 그런 날카로움이나 정확성은 없었다. 다만 그 판단들은 너무나도 분명할 뿐이다.
안느가 빈정거렸다. "하지만 나도 그것에 대한 상식은 좀 갖고 있지."
"그렇게 해서 그분은 그 어린애를 키웠던 거에요. 그리고 아마도 그분은 간통의 불안이나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거에요. 그분은 수많은 여자들이 겪는 바로 그러한 삶을 누리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이 자랑스러운 거예요. 알겠어요? 그분은 젊고 부르주아적인 아내와 어머니의 입장에 처해 있었고 또 거기서 벗어나려는 노력도 전혀 하지 않았어요. 그분은 이것도 저것도 하지 않은 것을 자만하고 있는 것이지, 어떤 것을 완수한 것을 자랑하는 게 아니에요."
"그건 중요한 의미는 못 돼."하고 아버지가 말했다.
"그건 속임수예요."하고 나도 고함을 질렀다. "나중에는 이렇게 말하겠지요. 난 내 의무를 다했다,라고 말예요. 왜냐하면 아무것도 한 일이 없기 때문잉에요. 만일 그분이 자기가 태어난 환경을 저버리고 매춘부라도 되었다면, 바로 그 점이 가치 있는 일이었을 거에요."
그건 아마 사실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말한 것에 대해 생각해보았으나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어본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내 인생과 아버지의 인생은 이 이론을 뒷받침하고 있었고 그래서 그것을 경멸함으로써 안느는 내게 상처를 입힌 것이다. 사람은 다른 것에 그러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찮은 일에도 집착하는 수가 있다. 그런데 안느는 나를 생각하는 사람으로는 보지 않았던 것이다. 갑자기 나는 그녀가 자기의 잘못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 긴급하고도 우선적인 일처럼 여겨졌다.
마흔 살, 고독에 대한 두려움, 어쩌면 관능의 마지막 간청일지도 모른다. 나는 안느를 한 여자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한 실체로는 생각했었다. 나는 그녀에게서 확신이나 우아함이나 지성 같은 것은 알아보았지만, 결코 관능성이나 연약함.... 같은 것은 본 일이 없었다. 나는 아버지가 자만하는 것도 이해한다. 거만하고 냉담한 안나 라르상이 자기와 결혼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오래도록 사랑할 수 있을까? 아버지가 엘자에게 가졌던 애정과 아는에 대한 애정을 나는 구별할 수 있을까? 나는 눈을 감았다. 태양이 나를 둔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우리 셋은 할말을 일부러 안 하며, 은밀한 두려움과 행복에 가득 차서 테라스에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도 자연스럽게 행복과 친절 그리고 태평스러움을 위해서 태어났지만, 그녀로 인해서 비난과 양심이 거리끼는 세계로 들어간다. 거기서 성찰에 익숙지 않은 나는 나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내게 무엇을 가져다주었는가?
나는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라는 말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형상을 만들 수 있는 반죽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형을 거부하는 반죽이었다.
나는 테이블 위에서 담배 한 개피를 집어 성냥불을 그어댔다. 성냥불이 꺼져버렸다. 두번째로 조심스럽게 성냥을 켰다. 왜냐하면 바람은 불지 않았으나 단지 내 손이 떨렸기 때문이었다. 성냥불은 담배 가까이 가자마자 이내 꺼져버렸다. 투덜거리면서 세번째의 성냥을 그었다. 그때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이 성냥이 나에게는 생사에 관한 중대성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아마도 그것은 갑자기 무관심에서 벗어나 미소도 띠지 않고 주의 깊게 나를 쳐다보고 있는 안느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이 순간에는 환경이나 시간도 소멸해버렸으며 단지 이 성냥과 그걸 잡고 있는 손가락, 회색 성냥갑과 그리고 안느의 시선만이 있을 뿐이었다. 심장은 미칠 듯이 고동치기 시작했다. 성냥을 쥐고 있는 손가락이 부르르 떨렸다. 성냥은 타올랐지만 내가 게걸스럽게 그쪽으로 얼굴을 내미는 사이에, 담배가 불을 덮어서 꺼져버리고 말았다. 나는 땅에 성냥갑을 떨어뜨리며 눈을 감았다. 안느의 냉혹하고도 의아해하는 눈초리가 내게 쏠렸다. 나는 그 누군가에게 제발 이 기다림을 멈추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안느의 두 손이 얼굴을 들어올렸다. 그녀가 내 시선을 보는 것이 두려워서 나는 눈을 꼭 감았다. 기진맥진한 데서 우러나오는 눈물이, 미숙의 눈물이, 쾌락의 눈물이 흘러내림을 느꼈다. 그러자 안느는 온갖 질문을 단념한 것처럼, 모르겠다는 듯이 마음을 가라앉히는 몸짓으로 내 얼굴에서 손을 떼며 나를 놓아주었다. 그러고 나서 내 입에 불이 붙은 담배를 물려주고는 다시 책에 몰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행동에서 어떤 상징적인 느낌을 받았다. 그녀에게 하나의 의미를 주어보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도 내가 성냥을 잘못 켤 때면 그 이상한 순간을, 내 몸짓과 나 사이의 그 간격을, 안느의 시선의 중압감을, 그리고 주위의 그 공허를, 그 공허의 농도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미 그것을 이야기했지만, 내 행동만이 나 자신을 판단하게 하는 것이다.
7. 파과
할머니의 말에 아이는 샐쭉하게 입을 내밀어 보인다. 아, 저 아이가 강 박사의 딸이구나. 저 아이는 그날 무슨 맛 아이스크림을 먹었을까. 아니면 예쁜 옷 한 벌이라도 새로 해 입었을까. 요즘 아이들 옷은 터무니 없이 비싸다던데 그걸론 모자라지나 않았을까. 아이의 뺨과 귀 사이에 난 작고 귀여운 점을 보고 조각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걸린다. 아이의 팽팽한 뺨에 우주의 입자가 퍼져 있다. 한 존재 안에 수렴된 시간들, 응축된 언어들이 아이의 몸에서 리듬을 입고 튕겨 나온다. 누가 꼭 그래야 한다고 정한 게 아닌데도, 손주를 가져본 적 없는 노부인이라도 어린 소녀를 보면 자연히 이런 감정이 심장에 고이는 걸까. 바다를 동경하는 사람이 바닷가에 살지 않는 사람뿐인 것처럼. 손 닿지 않는 존재에 대한 경이로움과 채워지지 않는 감각을 향한 대상화.
이제 내가 당신에게 뭐라고 하면 좋을까.
마주친 첫 순간 투우는 그녀의 버들눈썹과 옴쏙한 두 뺨이며 강퍅해 보이는 입술을 바로 알아보았고 물론 상대편에서는 소 닭 보듯 멀뚱히 건너다보며 이쪽에서 선배에게 건네는 인사를 거절했다. 우리는 서로 모르고 지내도 되네. 팀워크로 하는 일도 아니고, 내가 알고 지내서 이익 될 만한 사람도 아닐세.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녀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함이 확실해지자 그의 몸 한 귀퉁이에서 약봉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한 시절과, 그것을 이루거나 부순 몇몇 장면들이 요동하며 그의 눈꺼풀 속으로 밀려들어왔다.
"그래요? 이거 귤인지 꿀인지 모르게 단데."
"그럼 한번."
조각은 주인 여자가 내민 손을 뿌그럽게 하지 않기 위해 귤을 받아 껍질을 벗긴다. 말랑말랑한 감촉으로 봐서 그리 시지 않을 줄이야 알았지만 입에 넣으니 주인 여자의 말 이상이다. 혀에 감긴 귤 알맹이가 부서지자 입안이 달콤하면서도 청량한 감각으로 채워지고, 세로토닌이 한껏 상승한 상태에서 조모와 손녀를 바라보니 그들이 진정으로 사랑스럽다. 나름의 아픔이 있지만 정신적 사회적으로 양지바른 곳의 사람들, 이끼류 같은 건 돋아날 드팀새도 없이 확고부동한 햇발 아래 뿌리내린 사람들을 응시하는 행위가 좋다. 오래도록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것을 소유할 수 있다면. 언감생심이며 단 한순간이라도 그 장면에 속한 인간이 된 듯한 감각을 누릴 수 있다면.
투우가 앞으로 한 발 나서며 귤을 짓밟자 터진 귤 냄새가 골목 안을 흥건하게 적시고 퍼져나간다.
"사람들은 자기가 가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면서 꼭 남더러 갈 곳을 끈질기게 묻더라. 당신 지금 자기가 뭐 하고 있는지 정말 알기나 해? 아는 건 단 하나, 목적지는 몰라도 하여튼 가고 있다는 사실뿐이지."
투우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조각은 만일의 경우 언제라도 놈의 잘도 미끄러지는 혓바닥을 잘라버리기 위해 칼을 고쳐 쥔다.
"딱 하나 오해하지 말았으면 하는 게 있는데, 내가 말이 안 된다고 한 건 그 형아가 서른여섯이고 당신이 예순다섯이라서가 아냐. 참으로 아름다운 사랑이지, 무려 자식뻘하고. 남들이 알면 어울리지 않네부터 할망구가 늘그막에 정신 나가 더럽다고 손가락질할 일이지만, 늙어버린 다음엔 피차 똑같을 텐데 말야. 당신은 얼마든지 그 사람을 바라보고 생각할 자유가 있어."
투우는 조각의 어깨를 슬쩍 스쳐 지나가다 허리를 굽히곤 그녀 귓가에 대고 거의 속삭이듯이 덧붙인다.
"근데 자격은 없지."
새금한 귤 냄새가 푸제르 향을 가렸다고 생각했는데 고개를 들고 보니 투우는 어느새 그 자리를 빠져나가고 없다.
이참에 한꺼번에 청소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하단 채소 칸을 연다.
거기 뭉크러져 죽이 되기 직전인 갈색의, 원래는 복숭아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물건이 세 덩어리 보인다. 집에 와서 그녀는 꼭 한 개를 먹었을 뿐이고, 그 뒤로 잊어버린 모양이다.
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운 시절을 잊은 그 갈색 덩어리를 버리기 위해 그녀는 음식물 쓰레기 봉지를 펼친다. 최고의 시절에 누군가의 입술을 가득 채웠어야 할, 그러지 못한, 지금은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에 손을 뻗는다. 집어 올리자마자 그것은 그녀의 손안에서 그대로 부서져 흘러내린다. 채소 칸 벽에 붙어 있던 걸떼어 내느라 살짝 악력을 높였더니 그렇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부서진 조각들을 하나하나 건져 봉지에 담고, 그러고도 벽에 단단히 들러붙은 살점들을 떼어내기 위해 손톱으로 긁는다. 그것들은 냉장고 안에서 핀 성애꽃에 미련이라도 남은 듯 붙어서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문득 콧속을 파고드는 시지근한 냄새를 맡으며 눈물을 흘린다. 얼마즘 지나 그녀 어깨가 흔들리고 신음이 새어 나오자 무용아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짖기 시작한다.
그녀는 앞날에 대해 어떤 기대도 소망도 없었으며 그저 살아 있기 때문에, 오늘도 눈을 떴기 때문에 연장을 잡았다. 그것으로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확인하지 않았고, 자신의 행동에 논거를 깔거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살아남으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일찍 죽기 위해 몸을 아무렇게나 던지지도 않았다. 오로지 맥박이 멈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움직이는 것은 휼륭하게 부속이 조합된 기계의 속성이었다. 류를 가끔 떠올렸고 그가 생전에 주의를 준 사항들에 자주 이끌렸지만, 제 몸처럼 부리던 연장으로 인해 손바닥에 잡힌 굳은 살과도 같은 감각 외에는, 류를 생각하면서 온몸이 뻐근하게 달뜨고 아파오는 일이 더이상 없었다. 그녀는, 나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뭔가 망설이는 듯한 강 박사의 목소리가 그녀의 뒷덜미를 잡아당긴다.
"그렇다고 해서 후회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 말은 그녀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자신이 돌아버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 같은 중얼거림에 가깝지만, 그녀는 지금 그 떨떠름한 한마디로 무저갱에서 건져진 것 같다.
"압니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 이것이어서, 고개를 돌리고 걷기 전 흘끗 본 얼굴이 증오보다는 처절한 슬픔이 고조된 간절함으로 빋어져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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